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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마을 비내리제

어린이과학동아 2006.11.01 21호

9회말. 2사 3루. 동점. 굳어진 어깨를 흔들며 침을 꼴깍 삼켰다. 상대편 투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준호가 홈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인다. 공이 굴러왔다. 직구다.
“뻥.”
한가운데를 제대로 맞췄는지 발에 짜릿한 충격이 전해 왔다.
“뛰어! 뛰어!”
내가 1루로 달리는 동안 준호는 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유격수가 땅에 튀긴 볼을 순식간에 잡아 홈으로 던졌다. 앗, 위험하다. 준호가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퍼억.”
준호의 손이 베이스에 닿는 동시에 공이 홈에 들어왔다. 눈으로는 식별 불가능이다. 그때 천분의 일 초차이도 분간해 내는 컴퓨터 심판이 소리를 높였다.
“세이프.”
“와아아! 7대 6! 이겼다!”
“준호! 준호! 준호!”
우리팀 선수들이 모두 준호를 얼싸 안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준호는 정말 믿음직한 친구다. 준호와 발야구를 하면 즐겁다. 준호가 없는 팀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 마을 아이들의 제일 큰 행사는 일년에 두 번 있는 마을 대항 발야구 시합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진짜로 팀을 짜서 경기를 하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얼굴과 몸을 직접 맞대고 경기를 하는 재미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주는 감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이번 시합을 위해서 나와 준호는 그간 매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며 맹훈련을 해왔다.
“준호야! 굉장해. 멋진 슬라이딩이었어.”
“네 적시타가 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지 뭐. 무엇보다도 요근래 태양 에너지가 충분해서 컴퓨터 심판을 쓸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준호는 센터 소속 컴퓨터 심판이 정확히 판단한 덕택에 시합에서 이긴 것을 퍽 맘에 들어했다. 보통 아이들 간의 경기 때는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컴퓨터 심판을 보내주지 않았다. 몇 달간 비가 오지 않은 덕을 이렇게 보는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센터를 나서는 순간 준호의 왼쪽 다리에서 소음이 났다.
“준호야, 다리?”
“아까 슬라이딩하다가 다쳤어. 아무래도 수리해야 할 것 같아. 좀 아프다.”
왼쪽 다리를 쓱쓱 비비면서 준호가 말했다. 준호는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가 없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준호는 인공다리를 싫어했다. 경기에 이겨서 기분이 좋았는지 다리이야기를 꺼내도 화를 내지 않았다.
“다음주에 있는 결승전에서도 잘해 보자.”
“응.”
태양빛이 강했다.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먼 산이 아른거렸다. 갈라터진 논바닥 위에 마른 벼가 뒤틀려 있다. 저수탱크의 물도 이미 바닥이 났다. 이대로 가다간 마을 사람들의 생계가 달린 다른농사도 모두 망친다.
우리 마을은 20세기말에 생산되었던 농산물과 99% 이상 유전자가 일치하는 농산물만 재배하는 환경 마을이다. 수확량도 적고 가뭄이 들면 속수무책으로 말라 죽지만 상당히 비싼값으로 팔려나간다. 해를 거듭할수록 곳곳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기형아들이 태어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극심했던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개발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의심했다. 아직도 돌연변이의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같은 환경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구입자로 돌아섰다.
언덕 위로 동그랗게 솟아오른 돔이 있는 거대한 공터가 보였다. 비내리제 유적지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국립과학연구소에 근무하는 삼촌이 있는 미림이의 말로는 돔 안에 강우장치와 연결된 거대한 컴퓨터가 있는데,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한다.

하지만 가끔가다 각종 장비를 실은 대형차가 돔 앞에 섰다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텅 비어 있는 곳일 뿐이다. 유적지앞에 솔라 바이크를 세웠다.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뜨겁다.
“진짜 가뭄이 오래갈 것 같다. 큰일이야.”
준호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인공강우신청 답변이 빨리 와야 하는데.”
지금 마을 사람들은 중앙정부에 보낸 인공강우 신청결과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마을에 가뭄이 들면 중앙정부에 인공강우 신청을 할 수 있다.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구름의 변화상태를 측정한후 구름에 비의 씨를 뿌리면 특별한 기상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비가 내린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인근의 마을에서 동의를 해야만 인공강우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마을에서 인공강우를 해서 구름을 다 써버리면, 다른 마을에서는 구름이 모자라서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준호야, 우리집에 들러서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 간식 머신을 새로 바꿨는데 딸기 아이스크림이
너무 너무 맛있어. ”
집에 도착하자마자 준호를 식탁에 앉히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간식 머신에게 주문을 했다.
“딸기 아이스크림 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계음이 또그랑 거리며 장난스럽게 답을 해왔다.
“권한 부족입니다. 다른 음식을 주문하세요. 미안짭짤.”
요새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시합 나간 사이에 엄마가 락을 걸어놓았나 보다. 음성명령 대신에 조정 버튼을 몇 번이고 눌러봤지만 접근코드가 없어서 락을 풀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준호를 쳐다봤다.
“야채주스라도 괜찮지?”
준호가 싱긋 웃었다.
그때 아버지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부엌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준호가 인사를 해도 대답하지 않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준호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준호는 영문도 모른 채 쫓겨 나갔다.
“왜 갑자기 준호에게 막 대하세요? 나랑 제일 친한 친구라는 거 아시잖아요.”
준호가 집을 나서자 마자 나는 화가 나서 아버지께 대들었다.
“그 자식 애비 놈 때문에 온 마을이 다 망했어.”
아버지가 꽥하고 역정을 냈다.
중앙정부에서 인공강우를 할 수 없다고 통보를 해온 것이다. 그동안 우리 마을에서 구름을 훔쳐 썼으므로 중앙정부의 인공강우를 허락할 수 없다고 윗산 마을에서 심하게 반대한 것이다. 자료화면을 틀자 한 남자가 전기네트를 쳐서 윗산 마을쪽 구름에서 비를 빼내는 장면이 나왔다. 윗산 마을 감시 카메라에 찍힌 사람은 준호 아버지가 틀림 없었다.
윗산 마을과 협상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수확량의 20%를 무상으로 제공해야만 인공강우를 허락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윗산 마을의 주장에 마을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

인공강우가 무산되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마을 사람들은 윗산 마을 쪽 구름을 몰래 사용한 준호네와는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준호네를 따돌리기로 한 것이다.
“불공평해요. 준호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마을 회의에서 결정한 거야. 너도 결정에 따라라.”
앞으로는 준호와 만나도 안되고, 화상통신, 이메일도 안된다고 아버지는 못박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준호가 어떻게 되었을까? 발야구 결승전이 있는 센터로 향하는 내 발걸음 천근 만근 무거웠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준호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다리를 많이 절고 있었다. 인공다리센터에서 수리거절을 한 것이 분명했다.
사방이 얼어붙은 듯 조용해 졌다. 다들 준호를 외면했다. 준호에게 다가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눈치만 보며 망설이고 있는데 경철이가 준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염치로 나타났냐? ”
“시합 있잖아.”
“너 따위는 필요없어.”
“결승전은 해야지.”
준호가 가방을 놓고 신발을 갈아신으려 하자 경철이가 준호를 밀쳤다.
“우리 팀이 지더라도 너 하고는 절대 같이 뛸 수 없어”
“맞아. 배신자에 대한 마을의 응징이야.”
다들 준호를 거세게 몰아댔다.
나는 마을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정말! 우리 모두 준호랑 친구잖아. 같은 팀이라구”
“친구? 자기만 살겠다고 구름을 훔치는 게 친구냐?”
“야, 강경철!”
“유나야! 그만해. 나 간다. 시합 잘해라.”
준호가 절룩거리며 경기장을 나갔다. 다들 눈을 내리깐 채 스트레칭을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뭔가가 정말 잘못됐다. 준호를 그렇게 보내면 안되는 거다. 나는 경기장을 뛰어나갔다. 준호는 센터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이고 있었다. 모든 다 비 탓이다.
“준호야, 윗산 마을에 가자. 인공강우 허락을 받아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같이 될 거야. ”
“우리가 간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겠어?”
준호가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해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야?”
윗산 마을로 가는 지름길은 좁고 가팔라서 솔라 바이크를 타는 게 무척 어려웠다. 산길을 지날 때는 바이크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준호 다리에서 나는 소음이 점점 크게 들렸다. 안타까움에 심장이 저려왔지만 아무말도 꺼내지 못했다.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윗산 마을 대표 사무실에 도착한 우리를 맞은 것은 민원처리 로보트였다.

번쩍이는 은색이 인상적인 로보트는 허리에 손을 쓰윽 올리며 약속 없이는 어느 누구도 마을 대표를 만날 수 없다며 우리를 막았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사정을 했지만, 로보트는 화상 메시지를 남겨 놓으면 보좌관이 검토해서 약속을 잡아 줄 지도 모른다는 말만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되풀이 했다. 혹시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기다렸지만 사무실이 문을 닫을 때까지 윗산 마을 대표는 끝내 우리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제 어디가서 빌 곳도 하소연 할 곳도 없다. 속이 체한 듯이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준호가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우리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해가 진 후였다. 나와 준호는 비내리제 유적지에 멍청히 앉아서 하나 둘 불이 켜지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집에 가기 싫었다. 아무 생각도 안났다.
헤드라이트가 비치며 대형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초록색 가운을 입은 건장한 사람들이 익숙하고 재빠른 솜씨로 정교해 보이는 장치들을 차 밖으로 실어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냐?”
젊고 늘씬한 여자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갈 거예요.”
나와 준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준호가 한 걸음을 내딛다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몹시 아파했다.
“저런, 다리를 심하게 다친 모양이구나. 당장 응급지원 요청을 하자.”
곱슬머리 아저씨가 준호의 다리를 살피며 말했다.
“소용 없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아무도 안 도와줘요.”
나도 모르게 울먹이며 답했다. 젊고 늘씬한 여자가 안됐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너희들 차안으로 들어와봐. 어디 한번 봐야겠다.”
초록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준호가 누울 수 있게 차안에 작업대를 폈다. 각종 장비로 가득한 차안은 상당히 밝았다. 젊고 늘씬한 여자가 준호의 다리를 살피더니 KS1028L이라며 나보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팀장이 준호의 다리를 고치는 동안 나는 곱슬머리 아저씨가 끓여준 달콤하고 따뜻한 핫초콜릿을 홀짝이며 그 간의 일을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니까 얼마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윗산 마을이 동의를 안하면 중앙정부에서도 인공강우를 할 수 없지. 그게 법이거든.”
초록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아, 난 왜 이럴 때 바보같이 눈물만 핑핑 도는 걸까?
“도와주세요. 무슨 방법이 없나요? 이대로 비가 오지 않으면 나도 준호도 더 이상 마을 아이들이랑 같이 지낼 수가 없어요. 영영 마을을 떠나야 할지도 몰라요.”
세번째 핫초콜릿 잔을 막 비울 때 차문이 열리고 준호가 밝아진 얼굴로 나왔다.
“유나야, 하나도 안 아퍼.”
준호는 내 앞에서 몇 번을 뛰어 보였다.
“다행히 아는 모델이라서 쉽게 고칠 수 있었다. 나도 인공다리를 쓰거든.”
자신의 다리를 툭툭치며 팀장이 말했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곱슬머리 핫초콜릿 아저씨가 팀장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흠… 그래? 한번 비를 만들어 볼까?”
핫초콜릿 아저씨를 바라보는 팀장의 얼굴에 마법사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비라는 이야기에 솔깃해진 우리들을 보며 팀장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여기가 비내리제 유적지인 것은 알고 있냐?
“네. 백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비내리제를 해서 인공강우를 했다고 배웠어요.”
준호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기술상의 치명적인 결함 때문에 사람들이 사용을 포기했다고 하던데요?”
나는 좀 자신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술상의 치명적인 결함이라…”
팀장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저 단순하게 기술상의 결함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여기 비내리제 유적지의 강우장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꾼 후 구름에 미터당 백만볼트의 전기장을 형성해서 얼음결정을 만들어내는 기계다. 구름 속에서 자라난 얼음결정이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비가 되도록 프로그램한 거지. 백년이 지났다지만 굉장한 과학기술이다.
다만, 강우장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한 날 한 시에 열두 살이상의 마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곳에 모여서 비오기를 기원해야만 해.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마을 사람 전부를요? 저 정말,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거예요?”
깜짝 놀란 나와 준호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해야만 비가 오니 비내리제를 포기하고 중앙정부에 인공강우를 의뢰하지.
그러나 팀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이 강우장치를 만든 과학자팀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도와주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했어. 비내리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거지. 다른 과학자들은 이 인공강우장치 개발팀의 뜻에 따라서 원래의 프로그램을 변형시키지 않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이 장치를 유지보수하는 일을 맡은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이야. 지금도 강우장비와 컴퓨터 상태는 최상이다. 당장이라도 비내리제를 통해 인공강우를 할 수 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말야.”
방법이 생겼다! 모든 피로가 단숨에 사라지고 힘이 솟아 올랐다. 나와 준호는 그 길로 마을 대표집을 향해 솔라 바이크를 몰았다. 미심쩍어하던 마을 대표도 팀장의 전문가적인 견해를 듣고 나서는 수긍을 했다. 하지만 이 일은 마을 대표 혼자서 결정을 할 일이 아니라 했다.
나와 준호는 당장 마을 네트워크에 비내리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올렸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비내리제 지지자가 되길 바라며 있는 힘껏 홍보활동을 폈다. 발야구팀 선수들도 그간의 일이 무척 마음에 걸렸는지 앞다투어 부모님 설득작전에 동참했다.
마을 사람들은 격론을 벌였다. 가뭄이 올해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언제까지나 윗산 마을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끌려 다닐 수는 없다는 의견에 공감은 하면서도, 값으로 도저히 환산할 수조차없는 엄청난 시간낭비와 인력낭비를 하느니 윗산 마을의 요구대로 농산물의 20%를 무상 제공하고 중앙정부의 인공강우지원을 받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팽팽하게 맞선 의견이 좀처럼 한 쪽으로 좁혀지지 않자 세 번에 걸친 마을 투표 끝에 결국 비내리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마을의 비내리제 소식은 전국의 매스컴을 들끓게 했다.

마침내 고대하던 비내리제날 아침. 유적지 주변은 비내리제를 구경하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최첨단 보도장비를 총동원하여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기자들로 북적였다. 비내리제 시간이 다가오자 백년 전처럼 흰 옷을 차려입은 열두 살 이상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유적지 바닥에 그려진 소용돌이 모양에 맞춰 줄을 섰다. 거대한 공터가 마을 사람으로 가득하게 채워졌다. 기대감과 흥분으로 나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렸다.

마을 대표가 돔에 얼음결정열쇠를 꽂았다. 유적지 바닥이 갈라지며 소용돌이 모양을 따라 마이크가 솟아 올랐다. 한가운데에 선 마을 대표를 선두로 하여 비내리기 기원은 소용돌이치듯 밖으로 밖으로 퍼져나갔다. 긴 절차였다. 우리 마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살았나 싶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엄숙한 긴장감마저 돌았다. 마침내 맨 끝에 선 사람이 비내리기 기원을 마쳤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염원을 무시하듯 하늘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케케묵은 테크놀로지에 의지하려 했다니…. 제대로 안되니까 비내리제를 그만둔 것 아니겠어?”
“이 일을 추진한 마을 대표는 당장 사임해야 해.”
실망한 사람들이 화가 나서 유적지를 떠나려고 하는데 돔에 연결된 컴퓨터를 모니터하고 있던 팀장이 큰소리로 사람들을 만류했다.
“잠깐만요. 세 사람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준호네 식구들이 빠졌어요.”
“이런! 뻔히 알텐데 무슨 심보로 이러는 거야? 하여튼 미꾸라지가 몇 마리가 물을 흐린다니까.”
여기저기서 화난 목소리가 준호네를 욕해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비내리제에 나오라고 허락하지 않았잖아요. 아무도 준호의 아픈 다리를 고쳐주지 않았잖아요. 준호가 이 비내리제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노력 했는데요. 더 이상 준호네를 따돌리지 마세요.”
“대표가 빨리 연락하세요. 지금은 마을 사람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내곁에 서있던 아버지가 마을 대표를 이끌고 준호네로 떠났다.
그늘 하나 없는 비내리제 유적지는 몹시 더웠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마을 사람들은 체면 불구하고 유적지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서 준호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참만에 준호네 차가 유적지 앞에 도착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마을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준호네를 맞아들였다. 마을 대표가 준호네를 소용돌이의 끝자리로 안내했다.

“준호 다리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간 언짢았던 일들은 모두 잊고 앞으로 잘 해봅시다.”
마을 대표가 준호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굳어있던 준호 아버지 얼굴이 풀렸다.
“구름 사건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마을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준호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을 사람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에 대고 비내리기를 차례로 기원했다. 드디어 맨 끝에 선 준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준호, 동이마을에 비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준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빛이 퍼지며 마을 사람들 머리 위로 투명한 장막이 펼쳐졌다. 탄성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을 천천히 읽자 유적지의 수십 개의 장치에서 초록색 빛이 솟아나와 하늘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하늘빛이 검게 변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신명나는 북과 징소리에 맞춰 홀로그램을 읽어갔다. 제각각이었던 말소리가 차츰 하나로 모아졌다. 본능처럼 몸속에 감춰졌던 노랫가락이 목에서 터져나왔다.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며 장막을 두드렸다. 굵은 빗소리에 질세라 노랫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흰옷 입은 사람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는 온 하늘을 진동시켰고 힘찬 빗줄기가 되어 메마른 동이 마을을 흠뻑 적셨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 만든 백년 만의 비내림이었다.
나는 준호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말을 했다. 내년 발야구 우승은 틀림없이 우리 마을 차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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