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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6회 파주 삼릉을 다녀오다 순릉: 인수 왕대비의 "옥 같은 마음의 며느리 " 공혜왕후 이야기

윤관우 기자 5레벨 2016.04.18 22:55

조선의 제9대 성종임금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順陵)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번지에 위치한 파주삼릉 내에 있다.

 

파주 삼릉 내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능이다. 왜냐하면 공릉의 장순왕후와 영릉의 진종과 효순 왕후가 모두 왕세자 혹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한 반면 공혜왕후는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특히 공혜왕후는 건너편 공릉의 주인공 장순왕후의 여동생이지만 왕가의 신분 계층상으로는 자매지간이므로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아버지는 세조 임금의 책사로 알려진 상당 부원군 한명회였다. 일찍기 창덕궁 지기로 구차한 삶을 연명하던 한명회에게 손을 내민 수양대군.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을 단박에 임금으로 등극시킨 1등 공신이었다. 이후에도 권력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한 전략으로 그의 딸들을 당시 해양대군이었던 예종에게 장순왕후를, 자을산군 성종에게 공혜왕후를 각각 시집보내게 되었다. 사가에서는 친자매사이었지만 왕가에서는 시숙모와 며느리의 관계로 변모하였다.

 

1456(세조 2)에 태어난 한명회의 막내딸 공혜왕후는 언니인 장순왕후보다 11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다. 세조가 승하한 1468(세조 ) 한 살 아래인 세조의 둘째 손자 자을산군과 혼인했으나 다음 해 언니인 장순왕후의 남편이자 시숙부인 예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남편 자을산군이 즉위하고 중전이 되었다. 만약 언니와 예종이 이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자매는 누구보다 돈독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외롭고 고된 궁중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중전이 된 공혜왕후에게는 상상도 못할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꽃다운 중전을 두고도 후궁과 늘 가까이 지낸 성종 탓에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냈음은 물론이고, 세조의 비 정희왕후 자성대왕대비와 성조의 모친인 추존 덕종의 소혜왕후 인수왕대비, 그리고 예종의 둘째 부인인 안순왕후 인혜대비를 떠 받드느라 숨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21세에 성종의 부친인 의경세자(추존 덕종)을 여의고 홀로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을 키우다 기어이 자을산군을 왕으로 만든 시어머니 인수왕대비.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이라는 저서까지 편찬(1475, 성종 6)한 당대의 여성 지식인이었던 시어머니를 10대의 가냘픈 소녀가 감내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훈의 첫 구절은 섬뜩할 정도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 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 [열녀] [여교] [명감] 등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 있으나 복잡하고 권수가 많아 쉽게 알아볼 수가 없다. 이에 이 책 가운데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뽑아 일곱 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소학부터 명심보감에 아우르는 여인의 도리에 관한 한 최고로 지엄한 교과서였다. 이 책에 적힌 대로 조심조심 살았을 것이다. "옥 같은 마음씨의 며느리 "를 원했던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는 곧 죽을 병으로 이어졌고 1474(성종 5) 415일 기어이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을 추측한 것이므로 역사적 근거는 없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언제부터인가 중궁은 아픈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온갖 약에도 효험이 없자 발을 구르는 대신들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진다.

중궁이 편치 않음으로 조관을 보내어 명산대천에 기도하게 하다

 

중궁(中宮)이 편안치 못하므로, 조관(朝官)을 나누어 보내어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기도하게 하였다.

中宮未寧, 分遣朝官, 禱于名山大川.

 성종실록 40성종 5년 3월 23일 무신 2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3023_002, 자료제공)


이 기록을 보면 중궁의 병을 걱정하여 성종이 직접 명산대천에 기도하도록 지시한 것을 보면 그리 무심한 지아비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병세가 깊어져서인지 아니면 다른 치료의 목적에서인지 중궁은 구현전으로 거처를 옮긴다(성종 5324). 이곳 구현전이 마지막 거처가 될 줄 알았을까?

  

신숙주·성봉조가 중궁의 쾌병을 위해 사직·종묘에 제사하고 사면할 것을 청하다

 

원상(院相) 신숙주(申叔舟)와 성봉조(成奉祖)가 아뢰기를,

 

"중궁(中宮)께서 편찮으신 지 오래되어 악해독(岳海瀆명산 대천(名山大川)에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으니 바라건대 사직(社稷)과 종묘(宗廟), 그리고 여러 사당(祠堂)에 기도하고, 또 사면(赦免)을 내리시어 인심(人心)을 기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院相申叔舟成奉祖啓曰: "中宮不豫日久, 禱于岳海瀆名山大川無效, 請祈于社稷宗廟及諸祠, 且降赦宥, 以悅人心" 從之

성종실록 41, 성종 5411일 을축 3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4011_003, 자료제공).

 

병세가 심해지자 원상들의 권유로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죄인들을 대거 사면하여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지아비이자 한 나라의 군주로서 아내를 위해 뭐든지 해보려는 성종의 애틋한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왕비가 구현전에서 훙서하다

사시(巳時)에 왕비(王妃)가 구현전(求賢殿)에서 훙서(薨逝)하였다. 백관(百官)이 전각(殿閣)의 외정(外庭)에 모여서 곡림(哭臨) 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巳時, 王妃薨于求賢殿百官集殿之外庭, 哭臨如儀

성종실록 41, 성종 5415일 기사 2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4015_002, 자료제공).

 

하지만 구현전으로 이어한 지 불과 22일이 지났을 무렵, 성종의 왕비이자 상당 부원군의 딸이며 장순왕후의 여동생이었던 공혜왕후는 구현전에서 오전 10시경 후사 없이 그렇게 세상을 등지게 된다.

공혜왕후의 죽음과 관련된 단서들을 실록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자세한 사항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공혜왕후가 처했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추측해 볼 뿐이다.

 

영조가 진종소황제가 죽었을 때 애닮은 마음을 행록으로 구구절절 표현했듯이, 성종 역시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 어필로 쓴 행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층층시하의 어른들을 두고 먼저 간 어린 아내의 죽음을 애써 슬퍼하는 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후 선릉으로 답사를 갈 때, 공혜왕후의 죽음에 대한 성종의 심경과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신하들이 대행왕비의 시호를 공혜, 능을 순릉, 혼전을 소경이라고 정하다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춘추관(春秋館)2() 이상이, 대행왕비(大行王妃)의 시호(諡號)공혜(恭惠)’ 라 하고, ()순릉(順陵)’이라 하고, 혼전(魂殿)소경전(昭敬殿)’이라고 의정(議定) 하여 올렸다.

議政府六曹春秋館二品以上議上大行王妃諡曰: 恭惠 敬順事上曰恭, 寬裕慈仁曰惠。】 , 陵曰: , 魂殿曰: 昭敬

성종실록 41, 성종 5419일 계유 2번째 기사(sillok.history.go.kr/id/kia_10504019_002, 자료제공).

 

여기서 '공혜(恭惠)’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라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하였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자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였다.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가 날로 더해갔다(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65&mn=RT_01_14_01, 자료제공).


결국 한 집안의 자매가 왕가로 시집가서 시숙모와 며느리의 관계로 한번 더 인연을 맺더니 모두 꽃다운 나이에 그것도 같은 능역에 묻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들 자매의 아버지인 한명회는 훗날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까지 당하게 된다.

 

평범한 능참봉에서 세조와 예종 그리고 성종 대에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어 그의 두 딸마저 모두 왕비로 만들고자 했던 한명회의 야심찬 전략은 결국 허망하게 끝난 셈이 되었다. 그의 두 딸이 잠든 이곳 공릉과 순릉엔 애잔한 기운이 느껴진다.

 

파주삼릉의 주인공들, 공릉의 장순왕후와 영릉의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마지막으로 이곳 순릉의 공혜왕후 가운데 영릉에 잠든 효순소황후(37세에 승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10대에 세상을 떠났다. 장순왕후가 17, 진종소황제는 10, 공혜왕후는 19세에 각각 승하하셨으니 애닮은 마음이 더 하다. 하지만 죽어서도 가까운 곳에 누워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할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순릉으로 들어가 보자.



제실의 전경. 세 개의 능을 관리하는 제실이라 그런지 규모는 큰 편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 또한 참도의 구성요소 중 어도가 사라진 상태다. 더욱이 왕비의 능이므로 조속히 어도를 상설해야겠다.

 


금천교에서 홍살문,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매우 자연스럽다.

 


파주 삼릉의 판위 중 가장 좋은 장석이 깔려있다. 하지만 가장자리의 돌이 너무 굵고 두터워서 어색한 느낌이다. 이 부분 역시 원래의 상설 그대로인지 아니면 이후에 보수과정에서 변모된 것인지 궁금하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은 문화재청 조선왕릉 관리소(02-3700-1814)에 전화를 걸어 문의하면 해당 학예사 선생님과 연결해준다. 예의 바르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 언제나 친절하게 응대해준다. 한 번은 왕릉의 석물 제작에 쓰인 돌의 원산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산릉도감을 일일이 대조해주시면서 강화도와 양주 인근에서 채취한 것이라는 힌트를 주었다.



관람객이 무심코 차 버린 참도의 박석을 다시 끼워 넣었다. 일부러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도가 없어 어색한 참도의 모습.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는 넓은 잔디밭에는 항상 멋진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왕릉 주변에 소나무를 심는 이유 중 하나는 각종 해충들로부터 왕릉을 지켜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한 이유를 알아내야겠다.

 


제향에 쓸 음식을 마련했던 수라간

 


능지기가 머물렀던 수복방. 수라간과 수복방 모두 최근에 리모델링 되었다. .

 


정자각

 


신계와 어계. 나지막하고 아담한 크기의 어계. 소맷돌의 주름이 인상적이다.


 

언제 봐도 우리나라 건축물의 단청은 아름답다.

 


비각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정자각 뒤편에서 능침 사이에 놓인 신교. 영릉의 어색한 신교와 비교해 보면 좋겠다.

 


축문을 태우던 예감.



영릉에 있는 어처구니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 손오공으로 보이는 어처구니. 다른 어처구니는 없네..^^

 


능상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그 아래 수복방과 수라간이 보인다.



 

능침은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씩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다다소 엄숙해 보이며 손이 노출되어 있다전형적인 제2(조선 초중기무석인의 모습이다.



앞에서 보면 조랑말 같은데 옆에서 보니 꽤 덩치가 좋은 석마의 모습.두툼한 다리가 튼튼해 보인다.



문인석. 큼지막한 옷 주름이 장엄해 보인다섬세한 표현은 자제하고 최대한 심플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한 느낌이다.



망주석과 세호의 모습. 의외로 세호의 조각은 전혀 섬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냥 살짝 튀어나온 정도이며 상단에 구멍이 나 있다.



이곳 순릉에 와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이 고석에 새겨진 귀면의 표정들이다. 공릉에는 아예 없고 영릉에는 다른 능에서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편이다. 하지만 이곳 순릉의 고석에 새겨진 귀면은 뭔가 달라 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하고 자세히 쳐다봤더니 정답은 크기였다. 다른 능에 비해 혼유석이 유달리 큰 것도 아니고 고석 자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석에 새겨진 귀면의 조각 자체가 넓게 표현되어 있다. 귀면 조각을 고석 가득 채워 그 표정을 더욱 현실감 있게 나타냈다. 역시 이 귀면 역시도 다양한 표정을 살려내었다. 눈과 코 입모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같은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흉측하게 생긴 얼굴을 조각하여 사악한 잡귀로부터 혼유석을 지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고석의 귀면. 하지만 흉측하기는커녕 귀여운 표정으로 석호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석물 중 하나이다.

 

평범한 크기의 혼유석과 고석들. 하지만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로 큰 귀면 조각. 멋지다.^^

 

세월을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난간석벌어지고 떨어진 난간석은 보충제로 메웠으나 벌어질 대로 벌어진 바닥재는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2기의 상설에 따르면 병풍석이 있어야 하는데 순릉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조선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난간석이 봉분을 애워싼 모습. 주변의 석양과 석호가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대체로 석호와 석양은 작은 편이다그만큼 섬세한 표현보다는 심플하게 조각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석호는 뭔가 무뚝뚝한 표정인데다 그 윤곽마저 흐릿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앙증맞은 발톱과 통통한 발을 보니 역시 석호 다웠다석호의 얼굴 표정도 다양하고 재밌다. 덕지덕지 붙은 지의류를 쓰~윽 털어주고 있었지만 참았다. 문화재는 소중하니깐.^^


 


석양의 경우에는 다리 아래에는 오픈되어 있지만, 앞발과 뒷발 사이는 붙어있다. 다리를 가늘게 만들어서 손상될 위험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장명등은 공릉의 장명등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장명등의 창에서 바라본 정자각의 모습.



지의류와 이끼들을 석물에서 몰아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오백년도 넘게 서 있던 석물을 어제 조각한 석물처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순릉의 역사와 함께 한 증인이지만, 석물의 풍화를 막으려는 최소한의 제거와 보수 처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재청에서도 엄청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언니인 장순왕후의 공릉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화려한 상설을 자랑하는 순릉세자빈으로 승하한 탓에 산릉도감에 따라 간략하게 상설된 장순왕후의 묘. 하지만 순릉에 비해 더 푸르고 풍성한 소나무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언제나 왕릉을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역사가 재밌어지고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과거의 주인공과 내가 직접 대화를 하고 있다는 신나는 착각이다. 해당 능의 주인공에 대해 사전에 공부를 하고 현장에서 들려주는 아빠표 즉석 강의를 듣다 보면 코 끝이 찌릿해지고 가슴은 뭉클해지기도 한다.

 



역사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잇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오늘도 나는 그 사건 현장에 나온 셈이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6.04.27

이번 기사도 앞의 기사처럼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어요. 기사를 읽는 친구들도 관우 친구와 함께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 거예요. 흠잡을 곳이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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